구글이라는 대기업이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대규모 자본을 투자하여 벌리는 조립폰 사업을 두고 한 개인이 왈가왈부 한다고 해서 변하는게 있겠느냐 싶지만, 그게 참 묘한게 윈도우비스타 역시 같은 생각으로 시작되어 잘 될 일이라 믿고 추진한 사업일 것이다., 그 과정속에 무수히 많은 회의를 거치며 검증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과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며, 생각보다 그 원인 역시 복잡하거나 하지 않고 단순한 경우가 많다.

구글의 조립폰이라는 개념은 신선하고 좋은 면도 있지만, 스마트폰을 노트북에 비유해 생각해보자. 우리는 데스크탑의 강력한 성능에 미치지 못하는 노트북 혹은 경량화 하여 휴대용으로 사용하기 좋은 울트라북을 거리에 들고 다니며 활용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노트북은 온전한 조립식은 없고, 베어본이라고 해서 기본틀만 갖춰놓고 자신이 원하는 부분을 넣어 사용 가능케 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왜 그럴까. 조립식으로 하면 내가 원하는 정확한 사양을 맞출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해 질텐데 왜 굳이 완성품을 이용하는가 가가 의문이다.

 

구글조립폰조립폰의 가능성을 논한다.

 

첫째, 제품의 마감

울트라북의 경우 제품의 경량화가 곧 휴대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뒷편을 통짜 마그네슘으 합금으로 만든다. 물론 강화플라스틱이기도 하고 알루미늄으로 제작하기도 하겠지만 프리미엄급은 더 가볍게 설계하기 위해 뒷면을 복잡한 구조로 만들어 내기보다 차라리 스마트폰 뒷면이 여러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있지 않고, 한번에 열고 닫을 수 있게 처리하고 있다.

근래에 들어 경량화에 대한 관심은 성능의 강화 이상이지만 위의 사례가 반영하고 있듯 경량화 보다 더 앞선 기준이 있었으니 바로 제품의 마감이다. 마감이 좋은 제품은 비싸고 좋지 못한 제품은 아예 팔리지 않는게 한국사회의 특징이었지만 근자들어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조금은 저렴한 폰을 찾고, 통신요금 역시 부담가는 수준에서 한단계는 낮추고 있다.

한편 중국산 TV가 예상외로 반응이 좋았던 적이 있는데, 그런 현상은 단지 가격차이가 많은데서 시작되었고, 한 때 나마 나름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부실한 마감 등 여러가지에서 문제가 생기고, 적어도 디스플레이 강국인 한국에서만큼은 반짝 돌풍에 그치고 말았다.

둘째, A/S

PC도 부품별 A/S는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는 편이지만, 이 마저도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휴대폰 부품별 A/S를 받아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게 가능하려면 주요부품 제조사들의 통합 애프터서비스 시스템을 구글이 주축이 되어 구축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 만만치 않은 작업이라 생각되며, 이 A/S문제가 해결될 경우 조립폰의 가능성은 무척 올라갈 것으로 생각된다. 반대로 잘 되지 않는 경우 소비자신뢰의 문제로 이어져 암초에 부딪힐 것이다.

다른 대안으로는 조립할 수 있는 부품의 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하되, 일부는 모듈화 시키는 방법이 있다. 서너개의 모듈로 좁혀놓고 조립하게 하는것도 가능한 방법이지 않나 싶다.

이래저래 부딪혀야 할 문제들이 많지만 구글이라는 세계적인 대기업이 나서는 만큼 가능성이 아주 낮은 것만은 아닐 것이나, 필자의 예상은 일부 국가에서 어느정도 자리를 잡는 대신 세계적 흐름은 되지 못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미국을 비롯해 일부 국가에서 성공적인 모델이 될 가능성은 타 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으나, 일의 순서가 미국에서 먼저 성공을 해야 한국을 비롯한 타국에서의 진출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지, 그렇지 않고 전세계적으로 단번에 성공하기는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다. 아이폰처럼 단기간에 열풍을 불러올만한 메리트는 여러부분에서 부족하나 오로지 가격적으로 파격적일 수 있다면 가능성은 높아질 수 있다.

앞으로 어떤 획기적인 돌파구가 등장할지 모른다. 다만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상으로만 보면 그리 희망적이진 않다는게 필자의 판단이다.

소트니코바 보다 잘한 아사다마오와 카롤리나 코스트너를 위한 변명

우리나라에서 김연아가 인기가 많듯이 아사다마오는 일본에서 많은 인기가 있습니다. 이렇듯 피겨를 잘하는 선수가 있는 나라에선 다 그렇게 자국선수를 응원합니다. 김연아 선수의 다큐멘터리에서의 발언처럼 피겨는 단지 스포츠의 영역외에 예술적인 가치를 더하고 있기에 동계올림픽의 꽃이면서 전세계적인 높은 관심을 받는 종목이므로 상위 성적을 가진 선수에의 관심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김연아가 대단한 것은 세계빙상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많은 일본이나 미국, 유럽과 달리 수 많은 견제와 질시 속에서도 꿋꿋이 실력만으로 인정받아 왔다는 사실 때문인데, 이것은 바로 예술점수와도 직결됩니다.

 

 

 

 

우리가 김연아로 인해 피겨에 관심을 가지며 점점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예술 점수가 누적된 경기 결과로 인해 높여가야 하는 매우 힘든 과정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아니어서 지금도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채점제 경기에서 예술점수는 심판들의 양심이기도 하지만 공인된 절차와 같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례를 잘 알지 못했을 때는 시니어에 데뷔한 신인이 생각보다 잘했음에도 예술점수가 예상한 것보다 적은 것을 보고 작은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진가를 국제심판들에게 점차 알려나가는 과정인 것인데, 뛰어난 선수일수록 그 과정이 매우 짧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초단기로 압축시킬 수는 없습니다.

소트니코바는 이런 과정을 거의 밟지 않았습니다. 소치올림픽 챔피언이 되었지만 그 전 대회에서 200점의 고지도 한번 밟아본 적 없는 선수입니다. 반면에 김연아, 아사다마오, 캐롤리나 코스트너는 모두 실력을 점진적으로 알려 정상에 오른 케이스입니다.

물론 셋 중에서도 김연아 외에 마오와 코스트너는 피겨계에 영향력이 큰 일본과 유럽계의 버프를 받아온 케이스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실력이 크게 부족하거나 비정상적인 수준의 편파판정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물론 없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실력과 위상이 올라가는 과정중에 있었던 것이지 완전히 깜짝스타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김연아는 점수 인플레이션의 주역입니다. 김연아가 130점을 넘기면 일반적으로 110점 정도를 받던 선수는 120점을 받고, 김연아가 150점을 달성하면 120점을 받던 선수가 130점을 받는식으로 점수 퍼주기 현상이 흔히 벌어졌으며, 김연아가 출전하지 않는 해의 세계선수권은 1위가 200점 부근에도 못 닿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주니어 시절 분명히 아사다마오는 가장 주목받는 신예였고, 시니어 데뷔 이후에도 김연아에게 밀렸을 뿐 정상의 선수임은 분명했습니다. 또한 일본 선수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리는 경우가 적은 건 아니었지만 김연아가 2008년 이후 완벽한 점프를 완성하고 승승장구 할때에도 아사다마오 역시 각고의 노력을 더해 김연아를 바짝 따라가는 거의 유일한 선수였습니다.

물론 2009년경부터는 확연한 레벨 차이를 보이며 더이상 라이벌이라는말을 하기도 무색할 정도였긴 하지만 그래도 아사다마오 역시 벤쿠버 올림픽 이후로 기초부터 다시 점프의 기본을 다지는 시간을 거칠 만큼 피겨를 사랑하고 열심히 하는 선수였습니다.

 

아사다마오아사다마오가 쇼트에서의 비참함을 극복하고 프리에서 멋진 연기를 마친 후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4 소치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쇼트프로그램에서 아사다마오는 처참한 점수를 받게 되는데 한때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는 55점이었습니다. 퀸 연아 에게 묻혀 이슈화가 덜 되었을 뿐이지만 그간의 경력과 전체적인 연기 퀄리티에 비해서는 상당히 낮은 평가 였습니다.

이번 소치 동계올림픽 피겨 심판들의 점수는 일관성이 없어서 더욱 큰 비난의 불씨가 되고 있는데, 캐롤리나 코스트너에겐 비교적 균형잡힌 채점을 했지만 그레이시 골드나 와그너에겐 평균 이하의 점수를 주었고, 오로지 과다 버프를 받은건 소트니코바가 유일 했습니다.  

유종의 미 거둔 아사다마오와 캐롤리나 코스트너

소트니코바의 이번 소치에서이 연기는 과거 김연아가 207점으로 여자 싱글 최초로 200점을 넘기던 당시의 연기에 조금 못미칩니다. 금메달을 목에 건 그녀를 옹호 하는 러시아의 주장은 기술점수에 치중해 있는데, 사실 아사다마오가 더 많은 점프를 실수 없이 해냈기 때문에 많은 피겨팬들은 러시아의 주장이 덧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소트니코바챔피언이 되었지만 실상 소트니코바의 연기는 아사다마오보다 나은게 없었다. 예술적은 느낌은 흡사했고, 기술적으로는 오히려 아사다마오가 더 나았다.

또한 두발로 착지하고, 스핀에서의 실수가 연이어 지적되면서 소트니코바의 연기가 무결점 연기가 아님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기술점수에서는 아사다마오에 비해서도 낮고, 앞서 지적한 것처럼 검증을 거치며 올라가는 예술 점수에서도 더 나을 수 없으니 당연 142점을 받은 아사다에 비해 홈어드밴티지를 감안하더라도140점이 최대치일 것입니다.

카롤리나 코스트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소치에서 은퇴하게 되는 건 김연아 뿐 아니라 마오와 코스트너 역시 그러한데, 이 셋은 모두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코스트너 역시 그간 유럽의 사랑을 받아 실력 이상의 점수를 받은 적이 여러차례 있었지만 이번 소치에서의 소트니코바처럼 엄청난 점수 밀어주기 정도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 러시아는 전세계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고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역겨운 오버점수를 준 것입니다.

사실 김연아를 제외하고는 앞서 말한대로 대부분의 상위권 선수들은 대개 피겨대회 주최국이 어디냐에 따라 조금씩은 점수를 더 받고 덜 받고 했었던것은 사실입니다. 오로지 김연아만이 실력으로 우승하면서도 끊임 없는 견제를 받으며 극복해내 점수를 높여갔으니 정말 대단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쇼트프로그램에서의 처참한 성적으로 일본 팬들에게조차 비난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던 아사다마오는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프리스케이팅을 끝내고 바로 울음을 터트린 마오의 심정은 쇼트에서의 충격을 만회 했다는데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피겨 인생을 클린 연기로 마무리 했다는데서 오는 만족감과 안도감이 더 컸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해외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소트니코바의 연기를 코스트너에 비해서도 좋게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소외되어 거론조차 되지 않은 아사다마오의 프리연기는 코스트너에 못지 않았습니다. 결국 소트니코바는 이번에 은퇴하는 세 선수의 훌륭한 연기에 못미치는 실력으로 금메달을 땃으니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고 할 수 있고, 이에 세게언론은 집중 포화를 퍼붓고 있는 중입니다.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수준의 점수퍼주기 였기 대문에 카트리나 비트 처럼 대놓고 비난하는 이들이 시간이 지날 수록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율리아리프니츠카야리프니츠카야갸 쇼트에 이어 프리에서도 넘어지는 실수를 하고 있다.

동계올림픽은 4년에 한번 열리므로 반짝스타가 종종 생기곤 합니다. 사라휴즈 가 그러했었기에 최근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소트니코바는 필자의 눈에는 190점 전후의 선수가 그날 유독 잘해서 200~210점 사이의 점수를 맞을 경기를 펼친 것으로 보입니다. 컨디션을 최상으로 본인 최고의 점수를 경신한 것도 실력이라고 보면 어찌 보면 소트니코바의 평가를 조금 올려주어야 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이백이십점을 넘길 그런 선수가 아님은 단언컨데 분명합니다. (위사진은 깜짝스타가 되었지만 버림받고 만 율리나 리프니츠카야)

아무튼 소트니코바 보다 더 잘해놓고도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카롤리나 코스트너와 우리의 김연아 선수 그리고 앞선 둘과 같이 은퇴를 하게 되는 아사다마오까지 각고의 노력으로 정상의 문턱을 오르락 내리락 했던 그녀들은 본인의 힘으로는 유종의 미를 거두었고, 외부적 요인으로는 소트니코바에 의해 그리 달가운 결과를 얻지는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김연아에 의해 무너지고 말 뻔 했던 아사다마오가 각고의 노력으로 꾸준한 성적을 내며 (사실 라이벌급은 안되지만) 라이벌로 불리운 일련의 과정들을 과거의 추억으로 묻게 되었습니다. 다시 볼 수 없는 시간이라는게 이렇게 무섭고도 아름답군요. 엊그제 16세때의 김연아의 얼굴을 TV로 보았던게 엊그제 같은데, 24세가 되어 8년간의 여왕의 통치를 끝내었으니 말입니다.

2차전지가 사용되는 곳은 일일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을 테지만 가장 주목받는 분야는 휴대기기와 전기차라 할 수 있다.

리튬황전지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울트라북이 갖는 본래의 컨셉을 먼저 생각해보자. 우선 기존의 노트북이 갖는 휴대성의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해 절전형CPU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무게도 줄일 수 있고 거기에 디스플레이 백라이트를 LED로 바뀌자 가볍고 오래가면서도 상당한 성능을 내는 노트북이 탄생할 수 있었고 이를 따로 울트라북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인텔은 이런 울트라북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만 사실상 개념은 별다른게 없다는 이야기다. 가벼우면서도 빠르고 오래가는 컨셉말이다.

그런데 아무리 성능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절전형CPU가 일반에 비해 성능치가 한참 아래인것만은 분명하다. 보통 울트라북은 3셀 혹은 2셀베터리를 이용하게 되는데 일반 노트북이 과거 4셀 6셀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배터리용량을 줄여놓고도 6~10시간 사이의 활용이 가능하니 격세지감을 느낄법하다. 과거 대부분의 노트북은 2시간 30분을 전후였던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

카이스트 신소재공학과 김도경 교수(최장욱 공동)는 리튬이온 배터리의 수명 및 에너지 밀도에 비해 리튬황전지는 약 5배 이상의 에너지 밀도를 갖는다고 한다.

 

울트라북과 전기차

전기차의 배터리 부분을 리튬황전지가 사용되어 훨씬 더 많은 축전을 이뤄낼 수 있다면 어떤 변화가 찾아오게 될까?

첫째, 배터리 용량이 5배 이상이라는건 두가지 변화를 예측해 볼 수 있게 한다. 기존에 사용중인 승용차 타입의 경우 배터리 사이즈 자체를 반으로 줄인다 해도 2.5배는 더 많은 용량을 실을 수 있게 되므로 더 다양하고 실속 있는 디자인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볼 수 있다.

두번째는 더 많은 종류의 차량이 전기차로 개발되고 생산될 수 있게 될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기존에는 승용차 위주였다.

휴대기기 쪽도 마찬가지인데, 같은 부피에 훨씬 더 많은 용량을 축전할 수 있다면, 배터리 사이즈를 작게 만들어 무게를 줄이려 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리튬황전지의 비용적측면

아직까지는 가정에 불과 하지만 약 2배 가량의 가격이 나간다 해도 휴대기기의 경우에는 상용화가 되었을 때 바로 채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김교수 연구팀에 의하면 나노 전극 재료합성기술을 활용하여 황 나노와이어를 수직으로 정렬하여 전극 재료를 제작해서 전극의 전도도를 극대화 시켰고, 나노와이어 표면에 균일하게 탄소를 코팅하여 수명저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런 기술들이 얼만큼의 비용상승으로 이어질 지는 필자가 알 수 있는 부분은 아니나 분명 오랜기간 상업적으로 개발 판매되고 있던 리튬이온에 비해 더 많은 생산비용이 들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혹시라도 리튬이온에 비해 비슷하거나 더 적은 생산비용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리튬황전지의 파급효과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과거로부터 개발에 성공하고서도 흐지부지 된 기술들은 대개 이런 비용적 측면을 해결하지 못해 사장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상용화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이유는 휴대기기의 경우 저 작고 더 오래 가는 배터리에 대한 기대치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높아서 지금보다 대략 2배 가량의 비용을 지불한다고 해도 가격적인 저항이 적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장 울트라북으로 치면 올해 소니가 13.3인치 울트라북을 1kg대로 판매하고 있지만, 이보다 더 가볍고 20시간 이상 사용이 가능하다고 하면 가격이 10만원 이상 더 비싸다고 해도 오히려 수요는 늘어나지 않을까?

리튬황전지가 상용화 된다고해도 절전형CPU의 사용은 지속될 것이다. 왜냐면 절전형CPU가 아닌 경우 발열을 제어하는 쿨링시스템이 더 많은 부피와 무게를 차지하게 되고 따라서 무게 역시 증가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보다 더 가볍게 더 오래가는 컨셉으로 나올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더 강력한 엔진

리튬황전지는 전기차의 더 강한 힘을 내는 엔진의 개발을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찬가지로 저장장치로서의 역할 역시 마찬가지인데, 각국의 내노라 하는 기업들이 차세대 먹기리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재생에너지 산업 쪽으로의 파급효과 역시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리튬황전지가 정말로 상용화 된다면, 그 파급효과는 정말 상당할 것으로 생각되므로 김교수팀의 연구성과가 성공리에 상용화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그런데 뉴스에서 보면 김교수팀이 원천기술을 개발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개선한것인지 불분명한게 아쉽다. 관련정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일개 불로거로서는 아쉬운 대목이다. 보도내용에는 오랜 난제를 해결했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정도 추측은 가능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정희 전 후보를 지지하는 층은 분명 존재하나 그 비중은 매우 낮다. 채 1%도 되지 않는 지지도로 대선후보 토론에 나선것도 문제라면 문제지만 토론에 임하는 태도 역시 문제였고 아니나 다를까 역풍이 불었다. 앞에서 비아냥 댄다고 내가 먼저 주먹을 날리면 법적 심판과 함께 일방적인 손해를 보는 것처럼 대놓고 상대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고 하는 그녀의 주장은 역풍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 역할 외에는 한게 없다. 다카키 마사오를 방송에서 직접 언급하는 과감함을 보여 일부의 긍정적 반응을 얻어냈지만 몇일이 지나는 동안 남은 것은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 라는 네거티브적인 면이 부각되는게 전부였다.

소신과 의지만 있으면 다 정치인이 되고 다 리더가 될 수 있다면 한 나라의 지도자를 열명을 뽑아도 자리가 부족할 것이다. 어느 시기에 어느 때와 상황을 만나 거기에 준비된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하는 일련의 과정에 억지로 개입할 수 있는 경우는 군사쿠데타 외에는 없다. 박정희가 그런 인물이었고. 지금까지도 역사적 비판을 받고 있다.

이정희 전 후보는 이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 그게 패배한 문재인을 지지했던 48%의 국민에게 사죄하는 길이다. 정권교체를 최우선으로 한다면서 문재인의 발언기회 자체를 빼앗는 이정희 후보의 선택은 지금 생각해도 아쉽다. 아니 앞으로 계속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99%의 국민이 원하지 않는 후보가 대선 토론회에 나와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토론한다는게 말이나 되는일일까. 그럼 군소 후보는 토론회에 나오지 말라는 말이냐며 반문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본래 토론이 최소 십여차례, 많게는 삼사십차례는 열리며 이정희에게도 기회가 주어지게 되는 것이 정상인데, 힘 있는 새누리당은 이런 자리를 피했고 자연 군소후보가 나설 기회 자체가 거의 없게 되었다. 즉 여러 토론에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막은 새누리당을 성토할 일이면서 1%도 안되는 후보가 TV토론에 나선다는 것 역시 그리 바람직해 보이진 않는 일이다.

아무튼 효과에 비해 역효과가 컸으므로 이정희는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야권 단일화 만으로 정권교체를 이룰 수 없다" 고 말하며 이어 "우리가 가야할 길은 민중 속으로, 민중과 함께 헌신하고 단합하는것" 이라고 주장하며 대선토론회에서 본인의 몫으로 기회를 살려냈다는 표현까지 썼다. 그러면서 통합진보당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이 퍼쳤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엔 이정희의 역할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한번 실기하면 다시 재 기회는 좀처럼 잘 오지 않는다. 세상 모든 일에 억울함이 없고 원하는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사실관계 보다 우선인 것은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이다. 오천만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공통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시간속에서 작은 다툼과 작은 억울함들은 그렇게 뭍혀 시간과 같이 흘러가게 된다. 이정희는 본인으로 인해 정권교체를 하지 못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상당하다는걸 생각해야 한다. 1차 토론의 활약은 결국 효과보다 역효과가 더큰 역풍을 맞았는데 그런 사실도 외면하는 현실인식에 문제가 있는것 아니냐 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진보정치의 미래를 위해서도 새로운 흐름과 새로운 인물이 나서야 한다. 이정희는 이제 그 소명을 다했다. 물러서길 촉구한다.

노인 무임승차 폐지논란은 본격적인 세대갈등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땀흘려 일궈낸 경제발전의 혜택은 지금의 50대가 주로 누리고 있는데 그들은 박정희 향수와 지역 갈등으로 18대 대통령에 박근혜를 선택하였고 이는 갈등의 통합이 아니라 갈등을 더욱 번지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역사적인 관점을 먼저 살펴보자. 후세대들이 박정희의 쿠데타가 정당하다고 인정하게 될까? 필자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박정희 향수가 있다면 박정희 심판론이 부딪히고 있다는 것인데, 일찌감치 정리가 되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이미 실기 했다는 생각이다. 그런 관점에서 과거와 어느정도 연관성이 적은 후보가 당선되어야 한다고 필자는 판단했다. 안철수 후보가 사퇴하기 전, 그를 지지했던 이유중에 하나였다.

박근혜 당선인의 임기동안 지역갈등과 세대갈등이 봉합될거란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역사적으로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를 인정할 수 없는 48%가 앞으로 5년간 달라질 수 있을까? 그렇다고 과거에만 매달려 있을 수도 없다. 애초에 박정희를 심판해야 했다면 그건 오히려 박근혜를 당선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50대의 몫이었다. 그들이 박정희 향수를 선택한 이상 이미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제대로 된 정리는 조금 더 뒤로 미루어도 될 문제가 되었다. 다시 말해 실기한 이상 조급하게 생각할게 아니라 조금더 차분히 한국의 미래를 위한 선택으로 갈등을 상징하지 않는 인물이 집권하는게 옳다고 본 것이다.

지역갈등넘어 세대갈등

복지는 확대해야 하는게 맞지만 뒤로 돌아간다는건 사실상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여 선진국이 겪은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현명하게 확대해 나가야 한다. 근래 세계적인 경제침체는 수출지향적인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성경에 요셉은 파라오의 꿈풀이로 7년간 풍년이 있은 후 7년간의 흉년을 예측하여 총리가 되었고, 풍년 동안 모아놓은 곡식으로 가뭄에서 이집트 사람들을 구했다. 오늘날 선진국들이 놓친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복지정책에 있어서 만큼은 갈길이 먼 한국은 선진국 복지가 지금까지 겪은 시행착오와 앞으로 보정해 나갈 상황까지 예측한 절충형 모델을 만들어 시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나아가기도 시간이 부족한데 과거에 우리는 너무 매몰되어 있다. 예를 들어 평균연령 80세를 넘어 90세이상도 바라보는 노령화 사회로의 진입은 세대간의 갈등이 아니라 세대간의 합의하에 복지의 절충점을 찾아야할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어찌 된게 지난 MB정부에선 나라의 재정은 복지가 아닌 엉뚱한곳에 투입했고, 세대간 갈등은 오히려 증폭되고 말았다.

지역갈등과 세대갈등을 해결해야할 핵심세대인 50대는 그 반대의 선택을 했다. 대선이 끝났는데 아직도 그런 분석을 하고 있느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는 이제 이런 갈등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가 집권 이후에 어떤 행보를 보였건 집권 과정상의 문제로 한국사회가 지난 반세기 동안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처럼, 박근혜 당선자의 집권기간 동안 갈등이 봉합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지금의 50대는 한국전쟁이후 피땀흘려 경제를 일으킨 세대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부모님이 고생해가며 키운 전후 세대로 70년대 이후 경제발전의 주역으로 발돋움 했다. 그런데 오늘날 그들의 선택은 자신들의 자녀들과 부모세대의 갈등을 오히려 부추키게 되었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끝자락에 위치한 그들이 차지하는 인구비율은 사상 최초로 2030세대보다 많아졌고 사회적 영향력은 가장 크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정책을 지지해야 세대간 통합은 이뤄질 수 있다.

노인 무임승차 폐지 논란은 젊은 세대의 반격이다. 철없이 보일지 몰라도 이런 현상 자체를 젊은 세대의 탓만으로 돌려서는 갈등은 커지고 반복될 수 밖에 없다.

국민연금을 예를 들자면, 지금의 70대 이상 노인들이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 만큼의 혜택을 얻지 못한 관계로 기초노령연금이 도입되어 보완되었지만 사실상 가장 큰 헤택을 보는 세대는 지금의 50대라 할 수 있다. 처음 설계된 60%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익율을 그대로 보장받기 때문이다. 지금의 40대초반만해도 40%로 줄어 들었으며 앞으로 30대 이하는 더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2030 뿐 아니라 그 아래 세대까지 모두 인구비율이 적어질 수 밖에 없는 저출산 시대가 거의 이십년 가까이 진행중이며 당분간 해결될 기미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20대 이상 그리고 40대까지는 과거로의 회귀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선택을 했지만 50대의 박정희 향수에 가로막히자 분노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젊은층이 바란 과거와의 단절을 50대가 부정했다. 안타까움 정도로 그치면 좋겠지만 박정희 향수로는 48%의 국민들을 화합하게 할 수 없다.

선진화된 정치의식을 가지지 못한 한국에서 압축성장한 경제 만큼의 변화를 바란다는건 무리라는 생각이 근래 부쩍 드는 이유는 바로 뉴타운 문제 때문이다.

십여년전 새누리당의 이명박 서울시장은 뉴타운을 입안하고 보수언론은 하루가 멀다하고 아파트값 상승을 이야기 하며 부추키면서 참여정부의 집값안정 대책을 소용 없게 만들었다. 거센 쓰나미 앞에서는 아무리 튼튼하게 지어놓은 방파제도 소용 없는 법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사람들은 참여정부의 실정으로 북에 퍼주기 한 일(햇볕정책의계승)과 부동산폭등을 들고 있다. 사실 이 쓰나미는 부추킨 사람들 외에 거기에 참가한 국민들 탓이 가장 크다. 스스로 쓰나미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국민들이 참여한 쓰나미인탓에 정부가 막을 수 없었다. 그걸 강력하게 막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민주주의가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이야기일 뿐이다. 결국 부동산 광풍은 전세계적으로 버블붕괴가 일어나는 와중에 같이 무너졌다. DTI규제가 결정적이긴 했지만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면 그런 규제도 별무소용이었을 것이다.

18대 총선 당시 이미 부동산 경기는 사그라들 조짐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는데 새누리당은 잘 추진해보겠다며 큰 소리친 여러 후보들이 전국적으로 대거 당선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돌아 보면 정작 뉴타운이 잘 마무리 되고 좋은 평가를 받은 예는 한건도 없다. 그런데도 또 다시 19대에서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지역적 갈등이나 세대간 갈등은 사실상 한국인들의 정치의식이 높아질수록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 걱정하지 않으며 물리적인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니 조급해 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타운을 입안하고 추진하던 주체가 국희의원이 되고 자치단체장이 되며 심지어 대통령까지 되었는데, 보여준것 없이 상황은 악화만 되었음에도 또다시 그런 당이 19대 총선과 18대 대선에 이기게 되었다는게 나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대선 이슈이기도 했던 박정희와 박근혜, 그리고 여야가 다투는 여러 사안들은 아직 한국의 국민들에겐 남의 일로 생각될 뿐이다. 정치가 곧 생활이라는걸 알지 못하는 낮은 정치의식 때문이겠지만 시간이 필요한 문제이므로 지켜볼 수 있는 반면, 어찌 된게 뉴타운으로 재미는 보고 해준것도 없는 당을 심판할 생각은 하지 않고 또다시 밀어주는 심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지역갈등? 영남과 호남의 표심을 가르는 이 지역정서는 그 무엇도 깨트리기 힘든 아주 강력한 장벽처럼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보다 유일하게 더 강력한게  있으니 내게 체감적으로 다가오는 손익계산이다. 직업군인은 월급 올려준다는 당을 찍으며 다른 이유는 듣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실제로 들은 말이다) 대기업 하청업체 직원은 부자 감세는 옳지 않은 일인거 같긴 한데 내가 일하는 직장이 잘 되려면 새누리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다른 어떤 이유도 자신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뉴타운 문제는 이런 손익계산의 범주를 벗어났다. 내게 고통을 준 당의 말을 믿는 그 어리석음에 질려 버렸다. 앞서 말한 직업군인과 같은 생각에 나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잘못된 생각이라며 나무랄 생각도 없다.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선택은 모두가 존중받아야 마땅하고 남이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뉴타운 문제를 꺼내는 것은 이 해괴한 사업을 바라보는 정상적이지 못해 보이는 그런 생각들 때문이다.

20평도 채 안되는 작은 집을 가진 이웃분은 뉴타운이 잘 되면 똑같이 20평짜리 아파트가 주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분담금이 발생한다고 말해주어도 그건 큰 평수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라며 말도 하지 마라는 듯 손사레를 쳤다. 듣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 사업주체(추진위,조합)가 없는 지역들은 사업성이 어느정도 괜찮다는 말까지 들었던 지역을 포함해 100% 취소결정이 내려지고 있다. 미온적이며 지켜만 보던 사람들이 돌아선 결정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실태조사로 드러난 분담금의 존재 때문이다. 아마 어떤 설명도 통하지 않던 이웃분도 분담금이 최소 1억 이상 들어간다는게 확인되면 돌아설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참여정부의 5년은 거의 모든 지표가 양호하고 한국은 앞으로 두걸음 정도는 내딛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부동산으로 발목이 잡혔다. 그 부동산 폭등의 주요원인은 뉴타운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세종시 문제도 있지만 지역균형발전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다시 말하면 부동산 폭등에 대한 책임을 참여정부체 묻는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공 방파제를 수십미터는 쌓아 올려도 될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고 해도 쓰나미는 막을 수 없다.

나는 앞으로의 5년이 걱정이다. 필자가 보는 박근혜 당선인은 이명박정부와는 조금 다를 것 같다. 아니 그렇게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래도 아쉬운건 지난 5년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급증한 국가채무를 다시 정상화 시키고 앞으로 닥쳐올 세계 경기의 장기침체기를 견뎌낼 내실을 다질 대통령이 필요한데, 박근혜 당선인은 그런 스타일의 인물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솔직히 필자는 나라가 이렇게 어려우니 다같이 고통을 분담하자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책임있는 자리에 앉아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오바마를 다시 선택했던 것이고.

이 사람 저 사람 해달라는거 다 해 줄 수 없는 상황이 아님에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 이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투표한 사람들이 있다면 너무나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제목을 보면 아실테지만 이번에 다루는 글의 주제는 조금은 민감한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세부적인 정책적 차이는 있을 수 있는 법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새누리당 역시 그러하고.

 민주당과 새누리당 지지자들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 당이 지향하는 바에 공감하여 지지층이 되었을 때는 비록 세부적인 정책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배를 탄 것으로 생각하는게 보수진영의 새누리당 쪽이라면, 반대로 민주당은 세부적 견해 차이만으로도 쉽게 뭉치지 못하고 있는 경향이 엿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대북관을 들 수 있다. 박근혜 당선자에 대한 기사를 보고 그 댓글도 보는 중에 놀라운 내용이 있었다. 안철수를 지지했다가 사퇴하자 문재인후보의 대북관에 문제가 있는것 같다며 안 찍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시대흐름을 반영한 대북관의 변화 필요하다.

햇볕정책은 북을 한민족이라 생각하고, 인도적 지원과 동시에 경제적 협력으로 남북안보를 보장하고자 하는 차원의 대북정책이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타이밍이라는게 있는데 이미 실기한 느낌이 강하다. 필자가 어렸을 때 김일성이 언젠가는 죽을 거란 생각을 했고, 군에 있을때 그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다시 김정일과 김정은으로 3대 세습이 이뤄질지는 꿈에도 몰랐다. 햇볕정책은 아래 자료를 보면 알겠지만 너무나 절묘한 타이밍에 이뤄지면서 세계인들의 공감마저 얻어낸 좋은 정책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대북퍼주기로 비난 받는 신세가 되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게 과거에 국한되는게 아니다. 오늘날에도 햇볕정책이 이어지고 더 나은 결과를 내었다면 그 평가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나 MB정부 들어 그 맥은 끊기고 되돌아 보았을 때 사람들은 대북퍼주기로만 기억하게 되었다. 그럼 여기에 공감해야만 옳다는 말일까? 필자는 그런 가치관을 따지자는게 아니다. 선택의 문제도 아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작고 큰 모든일이 내가 생각하는 정의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걸 인정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정의가 모이고 모여 여론이 되고 그게 국민의 선택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대북정책에 있어서 과거의 일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이 대북관을 재수립하는것도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오늘날 많은 국민들은 통일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적어졌다. 노인층은 대북퍼주기라며 맹비난한다. 민주당 지지자들 중에서도 햇볕정책의 원안에는 찬성했지만 이제 되돌리기 힘들어 졌다는걸 인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쉽게 말하면 왜 대북문제로 발목을 잡히느냐는 의견이 많은 것이다.

18대 대선에서 민주당이 집권했다면 대북정책에 있어서 이젠 MB식 대결구도만이 능사가 아니라는것을 보여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이제 실기하고 기회는 떠나 버렸다. 필자가 말하는 대북관을 수정한다는 것은 북한과의 관계에 그리 연연하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나중에 집권을 하게 되고 북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긍정적 상황이 왔을 때 억지로 거부할 필요도 없지만 반대로 억지로 화해모드를 지속하려 할 필요 역시 적어졌다는 뜻이다.

 

 

자유로운 왕래 수준이면 충분하고, 통일비용을 부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자료는 현대경제연구소에서 실시한 통일의식 여론조사 내용으로 모든 국민의 대북의식을 100% 대변한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참고 자료로 보면 되겠다. 통일을 원하는가에 대한 막연한 질문에는 언제나 80%전후의 응답을 보이면서 막상 북에 대한 신뢰도는 2000년에 비해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런 악화의 원인이 북의 도발 때문인지 대북정책의 문제인지 따질 때는 이미 지나간게 아닐까 싶다.

현대경제연구소 2012년 남북 관계 대국민 여론조사 중

 

MB식 대결구도는 지양해야

민주당이 새로운 대북관을 수립하여 그 내용이 이성적이라는 판단이 서게 되면 MB식 대결구도를 비판하는데 있어서 힘을 얻을 수 있다. 햇볕정책의 연장선이라면 MB식 대결구도를 비난하기에 역부족인 상황에 이르렀다. 필자가 주장하는 이런 대북관의 변화는 그게 꼭 정의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국민의 뜻이 표로 증명하며 대북관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필자 개인적으로는 당시의 기준으로 가장 이상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대한민국의 국민들의 다수는 통일에 대한 염원이 줄어들었고 당장 북에 대해 어떠한 무조건적인 지원은 싫어 하게 되었다. 이점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민주당의 회생은 어렵지 않나 싶다. 세상에 지금 꼭 필요한 일이라 싶은게 안될때가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나중에 통일이 가능한 긍정적 여건이 만들어 질 기회가 언젠가는 올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햇볕정책은 과거가 아닌 현재 기준으로는 억지로 관계를 개선하려는 시도로 밖게 국민들에게 비쳐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노력없이 어찌 통일을 할 수 있을 것이냐는 의문을 표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시점 자체가 다른 말이다. 통일을 왜 해야 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서로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면 중지가 모아지는 여론을 따르는게 민주주의니까. 다만 성향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 국민들에게 그 필요성을 효과적으로 인정 받을 수 있도록 설득에 성공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조건 없이 지원하고 조건없이 이게 정의니깐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을때 국민들은 지지해주지 않게 된다.

문재인후보는 경쟁력이 없지 않다. 일부에서는 민주당의 경쟁력이 떨어지니 문재인후보가 오히려 손해를 본것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나는 그것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문재인과 민주당은 최선을 다 했고 경쟁력도 있다. 문재인 후보는 무려 48%라는 큰 지지를 받은 후보인데 그 의미를 애써 깍아내릴 필요는 전혀 없다. 다만 백만표의 지지율이 왜 차이났는지 그 갭이 어떤 이유로 발생했는지 살펴보고 인정할것 인정하고 개선할 부분은 개선해야할 것이다. 앞으로 관련된 이야기를 다룰 기회가 있을 테지만 간략하게만 소개한다면 나라의 재정위기와 지역경제의 위기(직접적이고 쉽게 말해 평창동계올림픽, 인천아시안게임의 재정적 위기상황)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충청과 경기 강원에서 설득하지 못한점, 그래서 굉장히 많은 표를 빼앗기게 된점, 노인층에게 어떻게 가까이 다가가고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지 등을 고민해봐야 한다. 

그나마 민주당에 희망이 있다면 차기 대선 주자가 여럿 대기중에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새누리당에는 마땅한 후발주자가 보이지 않고 있다. 민주당의 차세대 대표주자로는 정봉주, 박원순이 있다. 안철수의 경우 독자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현 시점에서는 포함하지 않았다. 아무튼 민주당의 대북관과 대북정책의 변화는 필요해 보인다는 주장을 재차 주장하며 글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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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의 정동영은 대선을 앞두고 말실수를 했다. 남의 글을 인용했다지만 그런 변명이 통할리 없었고, 새누리당은 선거운동에 세대간 갈등을 부추키며 투표를 호소하는데 세대간 대결구도를 이용했다.

세대별 특징으로는 사상 최초로 20-30 세대의 수가 40-50 세대보다 적어 졌다는 점인데, 전체 수도 적으면서 투표율도 적었으므로 절대적인 수로 따져보면 더블스코어에 가까운 꽤나 큰 차이가 나게 됨을 알 수 있다. 20대가 60%넘게 문재인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50대가 같은 비율인 60%로 박근혜를 지지하면, 실제 결과는 상당히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데 거기에 50대의 투표율이 89.9%에 이르면서 20대의 65%랑은 비교가 안될 만큼 압도적 차이를 냈다.

따로 놓고 보면 20대의 65%가량은 나름 선방한 투표율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연령대가 고르게 투표율이 올라간것과 비교해보면 상당히 부족해 보이는 수치다. 특히 50대의 89.9%라는 엄청난 투표율은 피치못할 상황에 있는 일부를 제외한 전국의 거의모든 유권자가 투표에 참여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출구조사지만 사실상 거의 정확한 수치로 이해할 수 있다. 이유는 방송3사의 출구조사가 매우 정확했으므로 연령별 투표율 역시 상당한 신뢰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지역갈등의 악몽은 연장되었다.

이번 대선에서 호남과 영남의 지역 갈등이 표로 연결되는 구도는 여전했다. 지역갈등의 주요원인은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이었고, 이 부분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으면 지역구도는 그 생명을 이어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박근혜 당선인이 당선됨으로서 지역구도는 해소되기는커녕 다시금 불씨를 지피게 되었다. 양측의 첨예한 대립은 이젠 어떤 해법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두터운 벽을 쌓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높고 두터운 벽으로 가로 막혀 있다 하더라도 세월의 힘 앞에서는 무력하다. 다시 말해 과거의 지역갈등의 원인을 제대로 정리하던가 아니면 지역구도와 관계가 덜 한 인물이 당선되어 세월이 지나는게 약이라는 말인데 박근혜라는 지역구도의 대표성을 갖는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서 박정희 시대 이후 현재까지 한국의 선진화를 막는 지역구도의 악몽은 되풀이 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는 박근혜 당선인이 정치를 잘하고 못하느냐를 떠나서의 문제이며 박정희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지역갈등은 계속 될 확율이 높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그래서 필자는 가장 이상적인 지역갈등 해소의 방법으로 지역구도와 전혀 동떨어진 뛰어난 인물이 두어번 집권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지역구도의 해소보다 당장 내앞의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투표로 말해줬다.

앞으로가 더 문제

1990년대 초부터 급격히 출산율이 저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95년부터는 1.5이하로 떨어졌고 다시 2천년대 들어서는 1.1 수준까지 내려가 세계 최저 출산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지금의 만20세로 투표권을 갖는 젊은이들은 이런 저출산 시대의 시작점에 서 있는 세대이다.. 그리고 그들은 미래를 향해 한발자국 내딛으려 하는 순간 자신의 결정이 아닌 남의 결정에 따르게 되고 말았다. 선두가 길을 잘못 들으니 뒤에 따라가는 세대는 허둥지둥 댈 수 밖에 없다. 문제가 심각하면 그 문제를 바꿀 수 있는 힘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너무 수가 적다 보니 힘이 모이기 어렵다. 같은 이유로 다시 5년,10년 후가 되면 새내기 유권자의 수 역시 점점 줄어들 것이다. 출산율이 회복되지 않는 이상 회복에 대한 기약도 할 수 없다.

미래 세대의 부담, 어느정도껏이어야지

지금 한국의 주류가 만들어 내고 있는 문제를 미래세대로 미루고 있는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대표적으로 국민연금에 대한 부담으로 현재 30대 후반정도까지는 불안감을 느낄 필요가 없지만 현재 기준으로 30대 이하로는 먼 훗날 지금의 수익율이 지켜지리란 보장이 없다. 이 역시 인구율 변화가 원인이다. 또한 이명박정부 들어 급증한 나라빚은 앞으로 박근혜 정부가 집권하는 동안 해결이 어렵다. 빚을 내 경기를 활성화 시키려 했지만 그 혜택은 서민들에게 가지 않고 건설업자에게 갔다. 나라빚은 그냥 세월가면 저절로 없어지는게 아니므로 누군가는 갚아야 하는데 박근혜의 공약은 부자증세에 부정적이면서 서민을 위한다는 모순된 논리를 갖고 있으므로 해결책이 될수 없다. 결국 필자가 제시하는 두가지 해법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MB가 주장한바 있던 747공약이 현실화 되든지 아니면 빚을 줄이기보다 추가적인 재정집행으로 약간의 나라빚의 증가를 감수하고서라도 예산을 예정대로 집행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두번째로 갈 확율이 높아 보인다. 현 세대가 있기에 후손들도 있는 것이므로 경제발전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이어가는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 정도가 과해서는 안되는데, 정확히 2012년의 현재가 과한 정도가 극에 이르른 시점인듯 싶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만큼 빛 보다는 그림자가 과하게 첩첩히 쌓여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원자력 발전은 싼 전기를 산업현장과 가정에 제공해 줌으로서 한국의 경제성장에 있어서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리고 현재도 원자력은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원자력 폐기물이 결국은 미래세대의 부담이 된다는 것쯤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알고는 있지만 체감되지 않다 보니 해결책이 담긴 더 나은 대안을 찾는 것은 내일이 아니라 여기게 된다. 결국 이 또한 지금의 20대가 몇십년후에 책임지는 위치에 섰을 때 해결해야할 문제로 넘어간다. 이 밖에도 수 없이 많은 문제들이 현재의 어려움에 뒷전으로 밀려나 후세대의 부담으로 은근슬쩍 넘어가고 있다.

강한 대통령은 변명일뿐

50대는 박근혜가 퍼스트레이디였던 시절에 10대를 보낸 사람들이다. 강한 대통령이 나라안보와 경제부흥을 할 수 있을 거라는게 지지의 주된 이유이다. 왜 지지하느냐고 물어 보면 박정희의 이름이 나오고 잘 할것 같냐는 질문에는 강한 리더쉽이 있으므로 잘 할거라 말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슈퍼맨이 아니다. 가능한게 있고 아닌게 있다. 세계경제의 침체기가 이어지고 미국은 그런 고통을 이미 겪으면서 많은 국민들이 오랜기간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사실에 공감하고, 그 고통을 최대한 다 같이 나누자고 주장하는 대통령을 선출했다. 반면에 한국은 그 반대의 선택을 했다. 강한 지도자가 경제발전을 주도하면 서민들의 어려움이 해소될 것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지만 70~80년대 때나 통하던 논리이다. 박근혜 당선자가 강한 리더쉽보다는 조화로운 리더쉽을 보였으면 하는 바램을 갖는 이유는 강한리더쉽이 통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다.

50대는 이렇게 자기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로 드러냈는데, 20대는 뒤로 숨었다. 65%안에 해당하는 20대는 투표로 의사를 표명했지만 너무나 많은 나머지 사람들은 놀러가거나 의사표명을 하지 않음으로서 자기들의 권리를 잃어 버렸다. 앞으로 적어도 20~30년간은 점점 젊은 사람들이(지금의 20대) 힘들어 지는 시대로 접어들 것이다. 고령화 시대를 넘어 초고령화로 평균연령 80세가 이미 넘어섰고 앞으로 멀지 않은 후에 90세도 넘어갈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에서 저출산 시대의 당사자들이 이제 성인이 갓 되어 세상에 나올 시기가 도래 한 것이다. 지금의 40세 전후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 IMF사태를 맞았다. 그 때의 후유증은 인생의 방향마저 틀게 만들었고 지금까지의 삶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선택은 20대의 미래에 두고두고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20대는 이번 멋모르고 안한 이번 선거로 인해 두고두고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50대가 바라는 세상에 자신들의 권리를 많은 부분 희생당한 것이다. 모든 일에는 균형이 중요한 법인데 균형을 잃은 투표율이었다는 점을 주장하며 글 마친다.

정동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한 트위터 발언이 문제가 되고 있다.

정동영의 발언이 왜 말실수인가 하면, 젊은이 vs 노인층 구도를 강조하며 투표하는 말 자체가 역풍의 빌미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필자가 특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언론인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다. 언론이 어떤 인물의 어떤 발언에 주목하는지 가장 잘 알만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말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공격의 빌미 제공하는 패턴도 모르는 정동영, 잘못한거 맞다.

새누리당의 선거전략에는 늘 비슷하게 나타나는 프레임이 있다. 그 중 대북발언과 함께 대표적인게 바로 노인층 투표에 관련한 발언이다. 그들은 늘 이런 부분을 주목하는데 어찌 이리도 쉽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해주는 것일까. 아직도 주먹구구식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 아닐까.

특히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오히려 같이 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조심을 당부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앞장서서 논란을 만들고 말다니 그가 왜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지부터가 의심스럽다.

발언의 뜻이 중요한게 아니다. 같은 뜻이라도 다르게 표현해야 했다. 일이 터지고 보니 하는 말이 아니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는지를 막연하게는 알아도 전략적인 대응책으로 준비해놓지 않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관련 발언이 나오고 마는 것이다.

정동영은 "선거란 우는 아이 젖 주는 건데 젊은이들아 안울어 침만 뱉어 이번에 하는 청춘투표가 인생투포야. 인생이 통째로 걸렸어. '너 자신에게 투표하라' 꼰대들 '늙은 투표'에 인생 맡기지 말고 '나에게 표'를 던지는거야" 라는 트윗을 했던 것인데, 아무래도 이 분은 언론인으로서의 노하우나 경력을 사실상 잊어 버리고 만게 아닐까 싶다.

좋게 표현하자면 젊은이들이 노인층은 챙기고 있는 권리를 자신들은 망각하고 챙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질타하며, 꼭 권리를 챙기라는 주장을 한 것인데, 표현함에 있어서 참 세련되지 못했다.

 

노인층 투표하지 말라는 말 없는데 과잉반응하는 새누리당

이에 대해 새누리당은 "나이들면 투표하지 말라는 것이 민주당의 본심이고 선거전략인가?" 라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새누리당의 대응조차 오버스럽다고 느끼는건 아마 필자 뿐만이 아닐것이다. 정동영의 말에는 세련되지는 못했어도 투표하지 말라는 뜻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노인층이 투표하는 만큼 젊은이들도 해라" 라는 의미이지 하지 말라고 해석될 부분은 없기 때문이다.

근래 선거분위기는 급격한 변화조짐을 보이고 있다. 과한 것에는 반감이 생기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정동영의 발언도 과햇고 새누리당의 반응도 지나친 면이 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새누리당이 약간의 이득을 본 사건이 되고 말겠지만 더이상 강조했다가는 반사이익을 얻는 부분조차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노인층은 투표하지 말라는 거냐'는 내용이 없음에도 지어내서 주장하는건 한두번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정동영의 발언이 일시적으로나마 반감을 사고 있을 때 치고 빠지는건 몰라도 계속해서 주장하면 역풍을 맞을게 뻔하다.

그런데 정동영은 민주통합당의 책임있는 자리에 그대로 있어도 되는 것일까? 필자느 그가 실수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번은 몰라도 반복되는 실수는 그에게 책임있는 자리가 어울리지 않음을 반증하는거 아니겠는가.

여론조사가 엉터리라는 인식이 심어진 것은 박원순 서울시장과 나경원 당시 후보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신뢰도가 높았던 것은 아니지만 서울시장 선거는 오세훈 전 시장이 정치적 이슈에 시장직을 걸면서 전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는데 여론조사를 해보면 나경원의 압도적 우세로 보였는데 막상 투표를 하고 결과가 나온 것을 보니 박원순이 당선되어 여론조사의 허구성을 국민들이 재차 깨닫게 되었다.

안철수의 지지세가 실재 한다는 것도 이 선거에서 드러났고, 정치에 나서게 된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했다. 박원순이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게 되었을 때 처음에는 5%의 인지도와 지지율이었지만 안철수가 양보하는 모양새를 취해 줌으로서 당선까지 되었다.

 

이제 서울시장 선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대선이 목전에 이르고 있다. 여론조사는 2012년 12월 13일을 기점으로 더이상 발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 여론조사에 국민의 시선이 모이는 가운데 다수의 여론조사는 문재인vs박근혜 구도에서 접전의 양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불과 일주일전까지만해도 평균적으로 4~%%의 격차가 있었는데 이제 사실상 일부조사에서는 역전이 될 정도로 초박빙이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이런 와중에도 오히려 격차가 더 벌어지는 조사가 있는데 바로 '중앙일보 조사연구팀'이 내놓은 조사결과다. 4일 발표한 결과로 많은 비난을 이미 받았음에도 또다시 13일 같은 조사팀이 더 벌어진 격차의 조사결과를 내놓으니 초지일관한다고 칭찬해줘야 하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전문가들은 응답율이 25~30%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대개 요즘 조사는 20%도 안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일단 나중엔 어떻게 되더라도 보도하고 보자식으로 해석하는게 맞을 것이다. 왜냐면 악의적 오보도 있겠지만 워낙 여론조사 결과 발표를 많이 하는 분위기니 묻어가기식 발표도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민심을 왜곡하는 '밴드 왜건효과'와 '언더독효과'도 그렇지만 필자가 가장 우려하는건 이런 행태가 많아짐에도 지적하는 사람은 적고, 여러 여론조사가 비슷한 결과가 나오니 평균을 내서 보면 되지 않겠느냐는 안일한 생각이 퍼지고 있다는 점이다. 관용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일에는 가혹하고 냉정한 사람들이 이런 부실한 여론조사에는 왜 그렇게 관대한지 모르겠다.

만일 이번에도 또 다시 서울시장 선거 때 처럼 여론조사 결과가 바뀌게 되면, 아예 법적인 규제를 강화하여 응답율과 오차범위에 대한 기준강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조사하고 발표 하는거야 여론조사기가관이 국민의 뜻을 알아보고 보도하는 것이니 권장할 만한 일이지만, 여론을 왜곡하는 결과를 내는데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는 신뢰도를 높일 수 있는 기준에 못미치면 발표할 수 없도록 규제하자는 것이다.

이제 대선이 일주일 앞이다. 민의가 왜곡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해지는 결과가 나오길 기대하며 글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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